정선군청 기관지 "아라리 사람들"에 명예 기자를 맡으면서 "아리리 사람들"에 기고한 글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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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군청 소식지 아라리사람들 




몇 년 전 가이드 없이 아이 둘과 육로로 말레이시아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입국 심사를 마쳤는데 가려던 목적지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모르겠는 상황이 발생했다. 영어에 자신이 없던 나는 고등학생이던 아이들에게 경비 서는 경찰관에게 물어볼 것을 요구했지만, 아이들은 서로 물어보기를 꺼렸다. 어쩔 수 없이 보호자이자 인솔자인 내가 직접 물어봐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나는 아이들을 뒤에 남겨 두고 거무스름한 피부의 강인한 인상을 가진 말레이시아 경찰관에게 다가갔다. 우물쭈물하면 안 될 것 같아 다가가며 몇 번이고 되뇌었던 영어를 자신 있게 경찰관에게 내뱉었다. "May I help you?". 


그런데 친절한 대답을 기대했던 내 기대와는 달리 강인한 인상의 경찰관은 나를 멀뚱멀뚱 쳐다만 보는 것이다. 시간을 더 주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할 것 같아 틈을 주지 않고, 준비한 다른 문장으로 나는 다시 물었다. "I want to go City Square. What is bus number?" 나의 연이은 물음에도 경찰관은 나를 가만히 쳐다만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이 열리며 내 머릿속에는 저장되어 있지 않은 그만의 영어를 나에게 길게 말했다. 동남아 발음의 영어라서 못 알아듣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경찰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내가 원하는 버스 번호만을 잡아내기 위해 모든 신경을 귀에 집중하여 경찰관이 내뱉은 수많은 영어 중 몇 개의 숫자를 잡아냈다. 이 숫자 단어를 버스 번호로 판단한 나는 오래 있으면 불리하다는 생각에 "OK! Thank you!"를 외치고 아이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급히 돌아섰다. 그러자 경찰관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띤 모습으로 "Do you understand?"이라고 몇 번이나 나에게 물었다. 약간 자존심이 상한 나는 다시 한 번 "OK!! Thank you"를 큰소리로 외치고, 당당하게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170번 버스 타란다. 가자!!"라고 하며 앞장섰다.

 

그렇게 알아낸 170번 버스를 타고 5분 정도 지난 후 버스 기사의 신호에 내리고 보니 내린 곳은 아까 경찰관에게 물었던 그 건물 옆이었다. 더구나 우리와 함께 출국 심사를 했던 사람들이 걸어서 육교를 넘어오는 모습도 보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까 경찰이 한 말은 걸어서 가도 되는데 버스를 꼭 타고 가야 한다면 170번 버스를 타고 가라는 것이었던 것 같았다. 무식하면 몸이 고생이라더니 진짜 맞는 말이다


어쨌든 그날 나는 조금의 고생을 하며 아이들과 무사히 말레이시아 국경 도시 구경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가이드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외국 여행을 다녀오니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오늘 하루 아이들에게 멋진 아빠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나름 대견스러워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외국에서 영어로 길도 물어보고 여행을 했으니 이쯤이면 세계 어디든 다닐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입가에는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나는 그날 나의 행동을 복기했다. 마치, 2002년 월드컵 안정환의 헤딩골 장면이 십 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케이블방송에서 나오듯이 나도 오늘 나의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몇 번이고 복기할 생각이었다. 말레이시아로 넘어가 경찰에게 길을 물어본 순간부터 하나씩. ‘May I help you?.....’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불길한 예감이 발끝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더니 마침내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입에선 탄성도 나왔다. 아뿔싸!! ‘May I Help you?’는 한국을 방문해 도움이 필요한 외국인에게 쓰라고 학창 시절 외운 문장이었다. 한국 온 관광객에게 친절한 한국인이 되라고 배운 말을 경비를 하고 있는 현지 경찰관에게 다가가서는 "내가 뭐 도와줄까?"라고 한 것이다. 한술 더 떠 모두 걸어가는 바로 옆 건물을 버스 타고 가려면 어떻게 가냐?’ 라고 무작정 묻고는 자기 말을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자신 있게 "OK Thank You" 만 외치니 경찰관은 나에게 ‘Understand?’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May I help you?는 내가 할 말이 아니었고, 그가 나에게 ”May I help you?“를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냉장고의 생수를 단번에 들이켤 수밖에 없었고, 자랑스러움이 아니라 창피함에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Posted by 빨간장갑 고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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